백년전(百年前) 오늘 신문<32>
Newsroh=륜광輪光 newsroh@gmail.com
백년전 동아일보 <휴지통>과 <횡설수설> 조선일보 <잔소리> 매일신보 <붓방아>는 1단 크기로 소개되던 고정물이다. 주로 취재 뒷이야기나 우스꽝스러운 에피소드를 다뤘다.
동아일보는 1920년 4월 10일자에 처음 ‘휴지통’을 선보였고 지령 100호째인 같은 해 7월 25일 ‘횡설수설’이 시작됐다. 역사가 무려 100년이 넘은 셈이다. 초기엔 이상협 편집국장이 두개의 고정란을 직접 쓴 것으로 알려졌다.
‘휴지통’과 ‘횡설수설’은 짧지만 촌철살인(寸鐵殺人)의 비평으로 인기를 끌었다. 일본어 혼용을 비판한 1920년 4월 27일자 휴지통은 삭제 뒤 재발매 처분이 내려졌고 “언론기관은 정지가 아니면 금지”라고 비꼰 횡설수설 집필 기자 최원순이 징역 8개월을 선고받기도 했다.
조선일보의 잔소리도 독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1924년 4월 20일 잔소리엔 ‘한달이나 재판소 방청하는 기생’의 사연이 소개됐다.
“경제가 하도 핍박하니까 기생들도 꽤 곤란한 모양이야. 요사이 공평동에 사는 김운선이라는 기생은 심심한 탓인지 정든 판사가 있는 지는 알 수가 없으나, 거의 한 달이나 내려오면 재판소 방청이야. 그런데 어찌 몹시 차리고 들어오는지 판사 영감들이 그것을 보기에 재판을 하지 못할 지경이라던가..”
조선일보는 4월 22일 ‘조선노동자의 참상’ 제하 기사에서 “조선인 노동자로 말하면 수 많은 일본인 노동자에게 일거리를 빼앗기는 것도 많으려니와 근래에는 중국인 노동자의 수효가 점점 늘어서 역시 직업을 빼앗겨 가는 이롭지 못한 처지에 있는 것은 일반이 아는 바”라며 조선인과 일본인 중국인 노동자의 일당을 게재 했다.
4월 23일 동아일보는 ‘사리원의 1천여 농호(農戶)’ 기사에서 일제의 동양척식회사의 착취때문에 정든 고국을 뒤로 두고 어린 처자를 데리고 서북 간도로 쓸쓸히 떠나는 동포들의 참상을 전했다.
아카이빙 전문매체 근대뉴스(http://www.19c.co.kr/) 가 제공하는 백년전 기사를 소개한다.
☯ 한 달이나 재판소 방청하는 기생 (1924.4.20.) 조선일보

경제가 하도 핍박하니까 기생들도 꽤 곤란한 모양이야. 요사이 공평동에 사는 김운선이라는 기생은 심심한 탓인지 정든 판사가 있는 지는 알 수가 없으나, 거의 한 달이나 내려오면 재판소 방청이야. 그런데 어찌 몹시 차리고 들어오는지 판사 영감들이 그것을 보기에 재판을 하지 못할 지경이라던가. 대관절 기생의 방청이 무슨 필요할는 지는 알 수 없으나, 장래에 기생 변호사가 법정에 나오지나 아니 할까 하는 것은 재판소의 잔소리. 그중에도 정정(廷丁)의 이야기가 우습지. 하도 많이 다니니까 이제는 정이 들어서 아니 오면 섭섭하더라고 하며, 재판소 출입은 신문기자에 지지 아니 할 걸요 하는 것도 그럴 듯. 판사 영감이나 서기 나리들이 여기에 홀렸다가는 결단날 걸.
☯ 조선 노동자의 참상(慘狀) (1924.04.22.) 조선일보
일본인보다 일급(日給) 1원씩은 적다
힘은 들이고 사람 대접은 못 받아
게다가 중국 노동자까지 덤비지

경제적으로 파멸을 달하는 조선인의 살림은 어느 지방이나 어느 사람을 물론하고 다 당하는 현상이지마는, 그중에도 목전(目前)에 급한 위협을 받는 것은 가난한 사람들이요 가난한 사람의 대표자라고 할 만한 노동자가 더욱 그러한데, 조선인 노동자로 말하면 수 많은 일본인 노동자에게 일거리를 빼앗기는 것도 많으려니와 근래에는 중국인 노동자의 수효가 점점 늘어서 역시 직업을 빼앗겨 가는 이롭지 못한 처지에 있는 것은 일반이 아는 바이요 그 외에 또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조선인 노동자의 삭전이 일본인 노동자보다 엄청나게 헐하여, 인력거꾼의 삭전을 제한 외에는 평균 1원씩은 헐하고 다만 중국인 노동자보다는 조금 많으나 밀가루 몇 숟갈만 가지면 살아가는 중국인 노동자보다 많은 것이 신통치 못할 것이요, 이리저리 쪼들려 지내는 조선 노동자의 운명이 참으로 참혹한데 이제 경성부에서 조사한 금년 3월 현재의 경성부 내의 각종 직공의 일급(日給)으로 받는 삭전 액수에 대하여 조선인과 일본인과 중국 노동자로 구별하면 다음과 같더라.
☯ 공개 된 창경원의 첫날 밤 (1924.04.22.) 동아일보
쌍방이 모두 실망
관객은 설비의 불완전에 실망
창경원에서는 손님이 적어 실망

그제 20일 밤은 창경원에 밤놀이가 시작되는 날이었다. 꽃빛을 시기하는 굳은 비 끝에 싹만 보이던 벚꽃의 웃음은 한층 생신(生新)한 기세를 보였으나, 짓궂은 구름의 저희(沮戲)로 예상 이상으로 관객은 적어 낮의 40,000여 명에 비하여 겨우 3,500명 가량 밖에 없었으며, 벚꽃의 『돈네루; 터널』를 이룬 창경원 일대에는 개벽(開闢) 이래의 처음으로 600여 개의 전등으로 불야성(不夜城)을 일어 꿈을 먹는다 하는 『맥(貘)』의 첫 잠도 달지 못할 지경이었었다. 아악대의 주악과 전기 회사의 찬란한 장식으로 한층 흥을 돋았으나 날씨가 다소간 추운 편이었으며 날이 흐려서 소요(逍遙)하는 관객들의 발자취에는 유유(悠悠)한 빛을 보지 못 하였었다. 꽃빛과 불빛 뿐만으로 창경원의 반도 못 되는 범위 안에 편히 쉴 곳 한 곳도 변변히 없으며 전등의 장치도 그다지 만족하지 못한 것으로 낮과 같이 10전씩을 받는다는 것은 너무 비싸지 아니 한가 하는 비난도 높았었는데, 이에 대하여 이왕직(李王職) 말송(末松) 사무관은 말하되, “낮에 10전 받는 것도 결코 이(利)를 남기는 것이 아니며 밤에 10전씩 받는다고 말이 잇는 것은 낮의 10전이라는 전제를 두고 하는 말씀이겠으나, 이번에 전등 장치에도 6,000여 원이 들었으니 10전에서 덜 받을 수는 없으며, 금년은 시험삼아 한 일이니까 내변부터는 여러 가지 경험을 쫓아 개량할 작정이 올시다.”
☯ 사리원의 1천여 농호(農戶) (1924.04.23.) 동아일보
동척(東拓) 이민에 쫓겨 간도(間島)에

황해도 재령군 북률면은 해마다 닥쳐 들어오는 동양척식 회사 이민 때문에 정든 고국을 뒤루 두고 흐르는 눈물을 억지로 참아가며 어린 처자를 데리고 마음없고 쓸쓸한 서북 간도로 떠난 동포도 많거니와, 지금 약간 얻어 부치는 소작인들도 시간의 차이는 있을 망정 마음놓고 농사를 할 수 없다는데, 논둑에 보이는 것마다 일본 사람뿐이요 초가(草家)일망정 깨끗한 집은 모두 일본 사람이 사는 집이며 그나마 서북 간도나 혹은 다른 곳으로도 갈 수 없는 동포들은 일본 집에서 노동을 해 주며 근근이 세월을 보내는 사람들도 많다는 바, 농촌까지 일본화 할 줄이야 누구나 뜻하지 못한 일이지만 동양척식 회사 토지를 소작하는 1천여 호는 그 회사에 진 빚이 모두 몇 백원 혹은 100원 이상이라는데, 그 빚을 조금이라도 갚지 못하면 소작은 그만두고 시재(時在; 당장) 먹을 것도 없는 이 처지에 농사는 무슨 돈으로 짓느냐 하며 두 사람이 모여도 눈물과 한숨이며 그밖에 사채(私債)도 퍽 많다는데 그와 같이 경제적 타격을 받게 된 것은 큰 수해를 마난 뒤에 작년에는 꿈도 안꾼 해일(海溢)로 인하여 남의 빚까지 갚을 여지가 없게 된 것이며, 누구나 그 땅을 처음 밟게 되면 쓰린 가슴을 걷잡을 수 없는 가련한 참상은 눈뜨고 차마 볼 수 없다더라. (사리원)
☯ 경성형무소의 실태(失態) (1924.04.23.) 조선일보

평안남도 강서군 쌍룡면 운포리 73번지 김관삼(金觀三)이라는 이의 부친되는 김선항(金成恒·58)은 3.1운동 사건으로 징역 15년의 판결을 받고 현재 경성형무소에서 복역 중인데, 지난 3월 1일에 경성형무소로부터 그 아들 김관섭 씨에게 이번 가례(嘉禮)에 의한 감형으로 3월 24일에 만기출옥 된다는 편지가 오고 또 20일에는 『방면일(放免日)에 오기 원해』 즉 방면되는 날 올라오기 바란다는 전보까지 왔으므로, 그의 가족들은 물론이요 동리 사람과 교회에서까지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한편 떡을 치고 돼지를 잡아 환영 준비를 분주히 하고 그 자제 김관섭 씨는 자기 부친을 맞으려고 경성형무소까지 가서 옷을 들여보내고 해가 기울도록 그 부친이 나오기를 고대(苦待)하였으나 나오지 아니 하므로, 박모(朴某)라는 간수장과 면회하고 질문 한 즉 대답하기를, 번호가 틀려서 통지가 그릇된 것이요 그의 부친이 나올 때는 못 되었다고 하므로 이 말을 들은 김씨는 낙담하는 눈물이 앞을 가리고 형무소의 무책임한 것을 원망하면서 캄캄한 앞길을 더듬거려 다시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그날 저녁에는 출옥되는 김씨의 부친을 만나려고 기양(岐陽) 정거장으로 모여든 그의 가족과 친지들은 이 형상을 보고 섭섭한 마음을 금치 못하고 더욱 환영나왔던 수 백 명의 동네 사람들은 모두 형무소를 원망하며 돌아갔는데, 김씨의 집에서는 자기 부친을 환영하려고 준비하기에만 100여 원이나 소비되었다더라. (진남포)
☯ 수원군 호구수 (1924.04.23)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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