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윤석열 대통령이 과거 독재 정권을 경악케 하는 당황스럽고 갑작스러운 계엄령(戒嚴令) 선포로 중무장한 군을 서울 거리로 파견한 후 의회의 탄핵 움직임에 직면했다고 AP통신이 4일 보도했다.
통신은 야당이 의회가 만장일치(滿場一致)로 계엄선포 취소를 의결한 지 불과 몇 시간 만에 탄핵안(彈劾案)을 제출했다면서 윤 대통령을 탄핵하려면 국회 3분의 2와 헌법재판관 9명 중 최소 6명의 지지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이어 “야당인 민주당은 300석 규모의 의회에서 과반수(過半數)를 차지하고 있으며 윤 후보자의 사퇴를 촉구하고 있다”며 ‘탄핵안 표결이 이르면 7일에 이루어질 수 있다’는 김용민 의원의 말을 전했다.

MBC TV 촬영
다음은 AP통신의 기사 내용.
계엄령이 내려진 긴장되고 충격적인 시간 동안 중무장한 군대가 육군 헬리콥터와 장갑차의 지원을 받으며 의회를 포위했다. 의원들은 건물에 들어가기 위해 벽을 타고 올라가 소화기(消火器)를 작동시켜 군대를 막아냈다. 정치인이자 전 뉴스 앵커인 안귀령은 한 군인이 자신의 가슴을 겨누고 있던 소총을 잡으며 말했다
“부끄럽지도 않나요?"
건물에 다시 진입한 의원들은 윤 의원 측 의원 18명을 포함해 190대 0으로 대통령의 계엄령 선포를 거부했고, 대통령은 서둘러 소집된 국무회의에서 이를 철회해야 했다.
한국 상황에 대해 알아야 할 사항은 다음과 같다.
윤 대통령은 '반국가' 음모를 비난했지만 세부 사항은 모호하다. 그는 3일 밤 늦게 연설에서 반란을 계획하고 있다고 말한 '반국가' 세력을 제거하겠다고 다짐하고 제1야당이 북한을 지원하고 있다고 비난하면서 경고 없이 계엄령을 명령했다.
윤 대통령은 북한을 불안정 세력으로 간주할 때 직접적인 증거를 제시하지 않았다. 그는 오랫동안 북한에 대한 강경 노선만이 북한이 한국에 대한 핵 위협을 추적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주장해 왔다.
1980년대 후반, 한국에는 국내 반체제 인사와 정적을 통제하기 위해 힘들게 싸울 때 북한을 반복해서 거론하는 일단의 독재자(獨裁者)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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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리뉴스>
박정희, 베트남파병 간청하며 계엄령 선포 이유?
1963년 11월 케네디가 암살당하고 들어선 존슨 정부가 베트남 정책을 서서히 바꾸기 시작한 가운데, 12월엔 박정희가 선거를 통해 대통령 자리에 올랐다. 1963년 12월 북베트남이 남베트남을 직접 공격하겠다고 의결했다. 미국은 1964년 3월부터 베트남 문제에 동맹국을 끌어들이는 정책을 구상하고, 4월부터 베트남에 '될수록 많은 국기를 꼽는 운동(More Flag Campaign)'을 전개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존슨 정부는 1964년 5월 한국을 포함한 25개 우방국들에게 북베트남의 공산정권을 패배시키기 위해 병력이나 물자 또는 다른 형태의 지원을 제공해달라고 호소했다. 한국 정부엔 야전병원 1개 부대를 요청함으로써 1964년 6월 한국이 130명의 야전병원 부대와 10명의 태권도교관을 보내기로 미국과 합의했다.
박정희 정부는 미국이 왜 베트남에 아직 군사침략을 하지 않는지 이해하기 어렵다며 전투부대를 보내고 싶어 했다. 존슨 정부는 남베트남이 전투부대를 아직 요청하지 않은 데다 게릴라전쟁의 특성상 특히 제3국으로부터의 지상군 운용이 부적절하다며 거부했다.
1964년 7월부터는 미국이 북베트남 통킹만 연안에서 정찰 활동을 펼치면서 8월엔 이른바 '통킹만 사건'을 조작(造作)했다. 박정희 정부는 1964년 9월 130명의 야전병원 부대와 10명의 태권도교관들을 베트남으로 보냈다. 제1차 베트남 파병이 이루어진 것이다. 한국군 최초의 해외 파병이었다.
한편, 1964년 3월 미국이 베트남 문제에 동맹국들을 끌어들이는 정책을 구상할 때부터 1964년 9월 한국 역사상 최초의 해외 파병이 이루어질 때까지 한국의 정치 상황은 몹시 혼란스럽고 위태로웠다. 1964년 3월부터 서울에서 한일협상에 반대하는 대규모 학생시위가 일어나는 가운데 군부 내의 쿠데타 움직임도 있었다.
주한미군은 권력투쟁엔 중립을 지키되 친미 군부가 박정희 정부를 전복시킨다면 지원한다는 방침을 정했다. 민주공화당 내분도 한일협정에 앞장서고 있던 김종필 의장의 권세 때문에 꽤 심각했다.
이에 미국은 박정희의 조카사위인 김종필을 박정희의 '밀사(eminance grise)' 또는 러시아 황제의 신임을 얻어 권세를 휘두르다 암살당한 '라스푸틴(Rasputin)'으로 간주하며, 박정희에게 김종필을 제거하고 공화당을 재건하라는 압력을 행사했다. 미국은 한국에 수십 억 달러를 퍼부어도 박정희 정부가 '혼란스러운 독재(messy fief)'에 머물러있다며 한국을 '커다란 실패작 가운데 하나(one of our great failures)'로 평가하고 있었던 것이다.
1964년 6월 한일협정 반대시위가 격렬해지자 서울대학교 총장은 박정희에게 65명의 대학생들과 많은 교수들이 공산주의자들이라는 정보를 제공하고, 박정희는 이를 빌미로 6월 3일 서울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이른바 '6.3사태'다.
하워즈(Hamilton Howze) 주한미군사령관과 버거 대사는 박정희에게 '미국의 승인이나 동의 (approval or agreement)'를 받았다는 사실을 공표하지 말라는 조건을 붙여, 한국군 2개 사단을 작전통제권에서 풀어주었다. 미국이 박정희와 공화당에 지나치게 간섭한다는 인상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며칠 사이에 민간인 1344명과 학생 523명이 체포되고, 학생 191명이 수배되었다. 박정희는 미국의 요구대로 김종필을 미국으로 내보낼 수 있었다.
1964년 9월 한국의 제1차 베트남 파병이 이루어진 직후에도 미국은 군사쿠데타의 가능성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공산주의자들이나 반미주의자들에 의한 쿠데타나 봉기가 일어나면 박정희 정부를 지지하지만, 내부의 권력투쟁엔 중립을 지킨다는 방침을 거듭 확인했다. 박정희는 이렇게 혼란스럽고 위태로운 상황에서 계엄령으로 반대세력을 제압하며, 베트남 파병을 통해 미국의 신임을 얻으려 했던 것이다.
이재봉의 ‘평화세상’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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