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전(百年前) 오늘 신문<38>
Newsroh=륜광輪光 newsroh@gmail.com

한세기전 서울에서 기상천외한 전시회가 열렸다. 이름하여 ‘파리 전람회’다. 프랑스 수도 파리가 아니라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해충 파리를 이른다. 세상에 파리 전람회라니, 오늘날 이런 전시를 한다면 가히 해외토픽에 등장할만한 뉴스가 아닐까.
그런데 그시절 파리는 최악의 무서운 해충이었던 모양이다. 1924년 5월 5일 동아일보는 ‘괴질(怪疾)과 파리’를 큰 제목으로 ‘파리는 우리의 큰 원수’라는 작은 제목의 기사에서 6월 1일 예정된 파리 전람회 소식을 알리고 있다.
신문의 논조는 자못 비장하다.
“파리가 우리 위생상 얼마나 무서운 해를 끼쳐 주는가는 너나 없이 잘 알고 있는 터이나 역시 직접으로 받지 않는 침해(侵害)라. 대개는 생명을 빼앗아 가는 두려운 원수에게 무신경 하기가 쉽다. 파리의 발과 입으로 옮겨 나르는 괴질(怪疾)의 균으로 인하여 역사가 있은 이래 생명을 빼앗긴 사람이 얼마나 많겠는가,”
신문은 파리에 대해 경각심을 가질 것을 강조하며 “벌써부터 이 구석 저 구석에서 파리가 날라 나오기를 시작한다. 우리는 그 파리를 볼 때에 그 한 마리 한 마리가 모조리 우리의 경애하는 부모 처자와 자기 자신의 생명을 노리는 원수인 것을 알아야 하겠다”고 파리를 철천지(?) 원수로 인식하라고 주문한다.
이어 “세상에 누가 칼을 들고 자기의 목숨을 빼앗으려 달려드는 자에게 대항이 없겠는가? 파리를 보고 잡지 않는 이의 어리석음은 실로 이에 비할 바가 아니니, 우리는 첫 여름부터 끝 가을까지 자기와 가족들의 생명을 옹호할 결심과 의기(義氣)를 가지고 파리채를 한 시도 놓지 않을 의무가 있는 것이라 한다”고 파리와의 전쟁(?)에 나설 것을 강력 촉구했다.
동아는 5월 6일에도 파리전람회를 알리는 ‘만평’을 게재해 시선을 끌었다. 거대한 괴물파리들을 돋보기로 눈을 부릅뜬 남자의 모습에게서 전사의 결의가 느껴질 정도다. 1920년대 초 일제는 파리 박멸을 위해 매월 1일과 15일을 '파리 잡는 날'로 정하고 일제 포획 작전을 벌였다. 1921년 경성(서울)에서는 '파리 수매제'를 도입, 파리를 10마리 이상 잡아오면 마리당 3리(약 60원 상당)를 받고 죽은 파리를 사들이기도 했다니 파리 박멸에 얼마나 열을 쏟았는지 알만하다.
동아는 앞서 5월 4일 ‘13년 만에 고국에 온 조선인 곡예사’라는 화제 기사를 보도했다. 경상북도 김천 출신의 오만술(吳萬述·20)이라는 청년이 8살에 일본으로 건너가 한 마술단에 맡겨져 온갖 고초와 노력속에 기예(묘기)를 익혀 마침내 동양 최고의 ‘한 바퀴 행거(行車 외바퀴 자전거)’ 기예가(技藝家)로 금의환향했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자전거는 ‘스스로 나아가는 수레’라는 뜻의 자행거(自行車)로 불렸는데 기록에 따르면 1903년에 대한제국 정부가 조정관리들을 위해 자전거 100대를 도입했다고 한다. 자전거 한 대 가격이 쌀 열 섬이었다니 퍽이나 고가품이었던 셈이다.
아카이빙 전문매체 근대뉴스(http://www.19c.co.kr/) 가 제공하는 백년전 기사를 소개한다.
☯ 13년 만에 고국에 온 조선인 곡예사 (1924.05.04.) 동아일보
8살 먹어 일본인에게 안겨
살 설고 물 선 일본에서 13년의 세월
그동안에 부친은 세상을 떠나

시내 명치정 동양척식 회사 맞은 편 광장에는 요사이 애연(哀然)한 음악 소리를 쫓아 수많은 젊은 남녀들이 노래와 마술을 보이며 그날 그날의 밥벌이를 하는 구경거리가 벌어졌다. 그중에는 중국인과 일본인이 섞여 있고 더욱이 13년 동안을 남의 땅 눈 선 땅에서 동서로 표랑(漂浪)하며 멀리 고국을 기리던 한 젊은 조선 남자가 고국에 돌아왔다. 그는 경상북도 김천군 김천면 욱정에 원적을 둔 오만술(吳萬述·20)이라는 아름다운 청년이니, 그는 8살 되던 첫 봄에 부모의 슬하를 떠나 산본(山本)이라는 일본인에게 안겨 일본에 건너간 후 즉시 대야(大野) 마술단에 몸을 붙여 전후 13년 동안 남 모르는 고초와 하소할 곳 없는 고단한 설움을 오직 기예 연구에 바쳐서 마침내 동양에서는 제일 간다는 한 바퀴 행거(行車)타는 기예가(技藝家)가 된 것이다. 자연 몸이 남의 단체에 매었고 흥행업자들에게 대단하게 보이지 않는 조선에는 돌아올 기회가 없어서 부모 형제의 안부도 전혀 모르고 눈물 끄는 군악 소리! 목숨을 매고 있는 자행거(自行車)에 넋을 실어 만사 일념(一念)이 산 곱고 물 맑은 고국에 돌아올 생각 뿐이더니, 다행히 지난달 상순에 일행이 부산에 상륙되자 그는 나는 듯이 김천에 일시 귀성을 하였으나, 이미 애자(愛子)를 고대하던 아버지는 이 세상을 떠나고 고절(孤節)을 눈물로 지키던 어머니가 있어서 그리던 하소 – 반기는 눈물에 손목을 놓지 못하였었다. 이미 몸이 남의 단체에 매인 터이라 그는 다시 반가운 회포를 다 하기도 전에 김천을 떠나 경성에 올라와 지금 『대야(大野) 마술단』을 쫓아 명치정에서 매일 세상에도 위험한 한 바퀴 자행거 타기를 보이는 것이다. 그 기예의 경쾌함과 위험하기는 실로 보는 이의 손에 땀이 나게 하며, 부인석에서는 『이제 그만하여라!』 소리까지 나는 터이니 만일 그같은 재주를 다른 곳에 발휘하였다면 – 하는 애석한 생각도 없지 아니 하였었다. 그는 자행거를 타고 나타날 때마다 모시 진솔 두루마기를 입고 관객에게 예사(禮辭)를 하는데, 조선 말은 모조리 잊어버려 일본 사람에 가까운 조선 사람이라 하겠으나 어느 곳인지 조선 티가 숨겨있어서 만나 보는 이의 마음을 끌고 서먹한 생각을 사라지게 한다. 그는 낮에 웃음을 싣고 “참 조선도 어려서 보던 조선보다는 퍽 변하였습니다. 서울 구경이 이번이 처음이라 도무지 꿈속 같습니다. 사정에 의하여서는 조선에 남아 있어 홀로 되신 어머니나 모시고 개인으로 흥행을 하고 싶기도 하나, 아직 생각 중이 올시다” 13년 동안 나그네의 길을 걷던 그의 웃음에는 참을 수 없는 애수의 빛이 잠겨 있다.
☯ 사립 학계의 권위 (1924.05.05.) 동아일보
20주년 맞는 보성전문학교
이용익 씨의 창립으로 재단법인까지
오늘로써 20주년 기념식을 거행

조선 사립학계의 권위인 보성전문학교는 오늘 5일에 창립 20주년 기념식을 거행하게 되었다. 이 학교는 세상이 다 아는 바와 같이 구 한국 군부대신 이용익(李容翊)씨가 일본의 문물을 시찰하고 돌아와서 넘어가는 세상을 붙잡아 볼 까 하고 광무9년(1905년) 을사년 4월 3일에 창립하여 신해영(申海永)씨가 교장으로 원(元) 박동 아어학교(俄語; 러시아어 학교) 자리에 학부의 집을 빌어 개교하고, 그 이듬해에 현재 보성고등보통학교 터로 이전한 후 그 이듬 해에 이용익 씨가 세상을 떠나고 영손(令孫) 이종호(李鍾浩)씨가 교주가 되어 경영해 오다가, 명치43년(1910년)에 일한(日韓)이 병합됨에 가슴에 끓는 피를 감춘 대로 당년의 지사 이종호, 이갑(李甲), 안창호(安昌浩) 세 분이 일엽편주(一葉片舟)로 망명하여 표연히 중국 위해위(衛海衛)로 가게 됨에 일시 학교도 비운에 빠지게 되자, 천도교주 손병희(孫秉熙)씨가 경영을 담당하게 되어 다수한 총준(聰俊)을 교양하다가 재단법인이 안 된 것이 구(舊) 전문학교 규칙과 저촉된다 하여 1915년에 보성법률상업학교로 교명(校名)을 고치고 경영해 오다가, 1923년 12월 18일에 고원훈(高元勳)씨 교장 당시에 천도교의 대표자 박인호(朴寅浩)씨가 10만 원, 진주 김기태(金琪邰)가 15만 원을 내고 그 외 유지의 기부로 재단법인이 완성되어 재작년 4월에 신 교육령에 의지하여 완전한 전문학교로 승격되고, 그 후로 내용을 충실히 하며 교수 방법도 일신(一新)하였다 한다. 전후 20년 동안에 파란곡절(波瀾曲折)을 무수히 겪어 이제는 기초가 완전하여 현재 재학생이 290명이요 졸업생이 592명으로 사회 각 방면에 헤어져 공헌이 많은 바, 직업별로 보면 관공리가 80여 명이요, 변호사와 소송대리업자가 20여 명, 회사원 20여 명, 신문 잡지 기자가 30여 명, 교원이 30여 명이며 금년 졸업생으로도 관공리, 회사원으로 24명이라. 이로써 사립 학계의 패권을 잡고 그 특색을 더욱 자랑할 것이다.
기념식 순서
-. 개식 : 축포(祝砲) 주악(奏樂)
-. 군대(君代; 기미가요)
-. 교가(校歌)
-. 식사(式辭)
-. 학교 상황 보고
-. 공로자 표창
-. 내빈 축사
-. 교우(校友) 축사
-. 교가(校歌)
-. 폐식 : 주악(奏樂)
여흥(驪興)
-. 오후 1시~시 : 축하식 폭죽
-. 오후 2시 : 식당
-. 오후 2시 반 : 음악회
-. 오후 3시 반 : 가장행렬
-. 오후 7시 : 연극, 활동사진, 폭죽
☯ 괴질(怪疾)과 파리 (1924.05.05.) 동아일보
파리는 우리의 큰 원수

◊ 돌아오는 6월 1일부터 시내에서는 파리 전람회가 열린다 한다. 물론 파리가 우리 위생상 얼마나 무서운 해를 끼쳐 주는가 – 는 너나 없이 잘 알고 있는 터이나 ㅡ 역시 직접으로 받지 않는 침해(侵害)라. 대개는 생명을 빼앗아 가는 두려운 원수에게 무신경 하기가 쉽다. 파리의 발과 입으로 옮겨 나르는 괴질(怪疾)의 균으로 인하여 역사가 있은 이래 생명을 빼앗긴 사람이 얼마나 많겠는가.
◊ 더욱이 파리를 두려워 하지 아니하고 살아오던 조선 사람들에게는 실로 세상에 아무 것보다도 파리가 두렵고 파리를 잡는 것이 곧 자기네의 생명을 보장하는 하나의 노력인 것을 깨닫게 할 필요가 있을까 한다.
◊ 벌써부터 이 구석 저 구석에서 파리가 날라 나오기를 시작한다. 우리는 그 파리를 볼 때에 그 한 마리 한 마리가 모조리 우리의 경애하는 부모 처자와 자기 자신의 생명을 노리는 원수인 것을 알아야 하겠다.
◊ 세상에 누가 칼을 들고 자기의 목숨을 빼앗으려 달려드는 자에게 대항이 없겠는가? 파리를 보고 잡지 않는 이의 어리석음은 실로 이에 비할 바가 아니니, 우리는 첫 여름부터 끝 가을까지 자기와 가족들의 생명을 옹호할 결심과 의기(義氣)를 가지고 파리채를 한 시도 놓지 않을 의무가 있는 것이라 한다.
◊ 죽음과 괴질.....괴질과 파리
여름 한 철 우리의 죽음은 거의 반 수 이상이니 괴질로 인한 줄을 알 때에 우리는 본능적으로라도 파리를 보고 잡지 않을 수가 없을까 한다.
☯ 샨메이드(SUN MADE) 건포도 (1924.05.04.) 매일신보

☯ 800만 원을 소실(燒失) (1924.05.06.) 매일신보
작년 중의 전선(全鮮) 화재
화재 수효가 3,630회요
타버린 집 수효가 4,300여 호

작년 중의 화재 수효는 실화(失火)가 3,117회이며 방화(放火)와 원인이 미상(未詳)한 화재가 204회로 합계 3,630회인데 그중에서 연소된 화재 수가 474회요 자기 집만 태운 화재가 2,275회에 이른 터인데, 그중에서 소방대의 힘을 빌지 아니하고 무난히 소화한 것이 881회이다. 그리고 이재(罹災) 호수와 피해 된 금액은 아래와 같으며
이재(罹災) 호수 피해금액
조선인 3,723호 715,272원
일본인 618호 6,529,753원 외국인 46호 142,296원
합계 4,387호 7,387,321원
이것을 지방별로 수효를 보건대
지역 화재 수효
경기도 675 경북 395 경남, 강원 346 평남 281 황해 262 전남 255 함북 107
전도 평균 179
이것을 다시 월별로 조사하건대
지역 화재 수효
1월 469
3월 439
12월 418
2월 417
4월 400
8월 112
월 평균 302
원인은 밥 해 먹는 온돌의 아궁이에서 발생한 것이 533회요, 연통에서 일어난 것이 377회이며 그 다음에는 모아둔 재(灰)에서 일어난 것이 332회요, 남겨둔 아궁이 불에서 일어난 것이 274회이며, 군불 때는 아궁이에서 일어난 것이 217회요 군불 때는 아궁이에 넣어둔 불에서 일어난 것이 185회이며, 불장난하다가 일어난 것이 277회요 버린 권연(卷煙)에서 일어난 것이 152회이며 그 외에 온돌이 파손되어 일어난 것이 223회라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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