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한식 교수님을 추모하며

큰 별의 퇴장, 그리고 나의 첫 만남
큰 별이 가셨다. 생존하는 ‘최고의 북한 전문가’로 불리던 평화학자 박한식 교수님이 1월 20일(한국시각 21일) 타계하셨다. 오랜 세월 교수로 몸담으셨던 조지아대학교가 자리한 미국 조지아주 어거스타에서, 향년 87세로 파란만장했던 삶의 여정을 마무리하셨다.
1939년 만주 하얼빈에서 태어난 선생은 해방과 전쟁, 분단이라는 현대사의 격랑(激浪)을 온몸으로 헤쳐오신 분이다. 그 치열한 생의 경험은 학문이 되었고, 사상이 되었으며, 실천으로 이어졌다. 특히 북미 간 갈등의 한복판에서 중재자의 역할을 맡아, 분단을 넘어설 수 있는 통로를 열어 보였다. 카터와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의 방북을 중재하며 북미 대화의 물꼬를 텄던 그는, 말로만 평화를 이야기한 학자가 아니라 행동으로 평화를 실천한 평화중재자(Peacemaker)이자 실천하는 지식인이었다.
그의 발자취는 이미 수많은 기사와 기록으로 남아 있다. 이 글에서는 그 업적을 다시 나열하기 보다, 내가 직접 만난 박한식 교수님과 그가 남긴 가르침이 오늘날 통일을 염원하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지 되새겨 보고자 한다.
박한식 교수님을 처음 뵌 것은 2009년 봄,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한반도 평화와 통일에 관한 국제 컨퍼런스에서였다. 윤길상 목사님이 주관한 이 자리에는 미 서부 지역의 학자와 활동가들 뿐 아니라, 미국의 대표적 한반도 전문가인 부르스 커밍스 교수와 박한식 교수님이 함께했고, 한국에서는 당시 ‘민족21’의 정창현 대표도 참석했었다.
당시는 내가 아직 본격적으로 통일운동에 뛰어들기 전이었지만, 그날 박한식 교수님의 발언은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다. 미국 땅에서, 한국인 학자로서 한반도 평화를 위해 이렇게 치열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큰 울림이었다. 깊은 감명을 받은 나는 행사 후 교수님의 명함을 받아 들었고, 그것을 작은 선물처럼 지금까지 간직하고 있다. 돌이켜보면, 그날 받은 영감이 몇 해 뒤 내가 통일운동의 길로 들어서게 한 자양분(滋養分)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통일을 지향하지 않는 평화는 없다
생전 선생의 부친은 “통일이 될 때까지는 국내에 돌아오지 말라”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1965년 도미 이후 평생을 해외동포로 살아오신 선생에게 이 말은 개인의 선택이 아니라 시대의 명령이었을 것이다.
선생은 800만에 이르는 해외동포들에게 ‘마땅히 돌아갈 조국이 없는 상태’가 분단이 남긴 가장 깊은 상처라고 강조하셨다. 통일국가만이 비로소 진정한 조국이 될 수 있으며, 그렇기에 해외동포야말로 이 시대의 소명에 눈뜨고 실천에 나서야 한다고 호소하셨다.
“남북관계가 대화하고 평화를 도모하는 길이 다 막혀 있다. 평화통일을 저해하는 요소들을 치료해야 한다. 돌아보니 한국은 그 사이 병자가 됐다. 열 가지, 열다섯 가지 병을 앓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특별한 길이 있음에도 그것을 발견하려 하지 않는다. 북도 살고, 남도 살고, 해외동포가 중심이 되어 다 함께 살 수 있는 길을 우리가 한번 제시해보자.”
한반도 문제를 두고 어떤 이는 평화가 먼저라고 하고, 또 어떤 이는 통일이 먼저라고 말한다. 그러나 박한식 교수님은 단호하면서도 온유한 목소리로 “통일을 지향하지 않는 평화는 진정한 평화가 아니다.” “평화만 하면 통일이 오지 않지만, 통일을 하면 평화가 따라온다.”라고 하셨다. 이 말씀은 복잡한 이론이나 논쟁을 넘어,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분명히 가리키는 나침반이었다.
아래로부터의 통일을 실험한 공간, 박한식 사랑방

2020년 9월, 코로나로 세상이 멈춰 선 시기에 교수님은 또 하나의 길을 여셨다. 뉴욕과 애틀랜타 동포들의 도움으로 시작된 ‘박한식 사랑방’은 매달 화상(畫像)으로 이어지며, 시공을 넘어 전 세계 동포들이 함께 모이는 평화의 공간이 되었다. 화면을 통해서였지만, 우리는 그곳에서 선생을 뵙고 그의 사유와 삶을 직접 마주할 수 있었다.
박한식 사랑방 1집 머리말에서 교수님은 이 공간을 이렇게 회고하셨다. 사랑방은 “통일을 더 이상 전적으로 정부의 손에만 맡겨서는 안 된다는 절박성과, 국민에 의한 아래로부터의 통일 노력이 필요하다는 공감대를 형성한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고. (박한식사랑방 영상과 관련 기사는 www.hsparksarangbang.com 와 www.newsroh.com 에서 볼 수 있다)
매달 전 세계 해외동포들이 머리를 맞대고 교수님과 통일평화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했던 박한식사랑방. 100여명이 참여하는 성황을 이루었었다.
전 세계 동포들에게 통일과 평화의 길잡이가 되었던 박한식 사랑방은 2025년 10월을 끝으로 막을 내리고, 앞으로는 평화연구소로 새롭게 거듭나게 되었다. 뉴욕의 김수복·김창종·한익수, 보스턴의 이금주, 애틀랜타의 장유선 선생을 비롯한 준비위원들의 오랜 헌신이 이 사랑방을 지탱한 힘이었다. 우리 단체 AOK의 성원들 역시 꾸준히 참여하며 질문하고 토론을 나누는 동행자였다.
2021년 8월 27일 건국대 새천년관에서 열렸던 박한식 회고록 [평화에 미치다] 출간 기념 특강 “남과 북이 만드는 통일평화대학”을 마치고. 615남측위, 해외위, 통일뉴스를 비롯해 여러 단체가 공동주최했고 온라인과 병행해 박한식사랑방 성원들이 줌으로 참석했다.
AOK와 교수님의 인연 또한 각별했다. 2021년 통일교육의 첫 강의와 열한 번째 강연에 박한식 교수님을 모셔, 북을 어떻게 인식해야 하는지, 그리고 왜 통일평화대학이 필요한지에 대해 깊이 있는 말씀을 들었다. 같은 해 8월, 건국대 새천년기념관에서 온오프라인으로 열린 회고록 <평화에 미치다> 출간기념회는 여러 단체와 함께 AOK가 공동 기획해 진행했다.
그 인연으로 교수님과는 전화로 자주 소통하게 되었고, 그는 해외동포와 함께하는 풀뿌리 통일운동 AOK에 각별한 기대를 보내 주셨다. “통일운동은 인성이 좋은 사람이 해야 합니다.” 그 따뜻하고도 단호한 음성은 지금도 가슴에 선명하게 메아리친다.
인권주의, 그리고 ‘사람이 먼저’인 통일
선생은 통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서로 다른 이념과 체제를 넘어설 수 있는 통일국가의 공통 이념이 필요하다고 보고, 그 답으로 ‘인권주의’를 제시했다. 인권은 어느 체제의 선전 구호가 아니라, 평등을 우선시하는 사회주의나, 정치적 자유를 강조하는 자본주의 민주주의를 넘어 인권이라는 언어에 인간의 얼굴을 입혔다고 할 수 있다. 교수님은 인권을 여섯 가지로 설명하셨는데, 생존권, 더불어 살 권리, 평등권, 자유권, 사랑권, 그리고 주권이 그것이다.
특히 누구나 자기나라를 가질 권리, 즉 주권을 가질 권리가 있다는 정의는 나라를 빼앗긴 경험이 있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명징한 권리이다. 무엇보다 ‘사랑할 권리’ 또한 당당한 인권이라는 말씀은 신선한 감동을 주었다. 사랑하는 피붙이를 평생 한 번도 만나지 못하게 만든 분단 체제의 반인륜성을 통렬히 지적하며 분단을 극복하는 정신적 토대를 제시한 것이다.

인권주의를 통일 이념으로 삼아야 한다는 선생의 가르침은 늘 놀라울 만큼 상식적이었고, 그래서 더욱 깊은 울림이 있었다. 이질적인 것은 배척의 대상이 아니라 조화의 대상으로, 동질적인 것은 배타의 근거가 아니라 연대의 자산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모든 출발점은 남과 북이 함께 지닌 가장 근본적인 가치, 곧 우리 고유의 얼과 정, 한의 정서, 그리고 사람을 중시하는 철학에 있었다.
‘오징어게임’이 세계적으로 화제가 되었을 때, 밤을 새워 드라마를 보셨다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최종 승자는 수백억 원의 상금을 받지만, 그 돈을 한 푼도 쓰지 못합니다. 그 상금이 여러 사람의 목숨 값이라는 걸 알기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기 때문이지요.” 또 남과 북 어디에서나 흔히 쓰는 말, “저런 인간은 언제 사람이 돼? 저이는 언제 사람이 되려나?”를 떠올리며, 남이나 북이나 우리는 모두 ‘양심’과 ‘사람’의 가치를 중시하는 민족이라고 강조하셨다.
박한식사랑방의 기록이 두 권의 책으로 출간되었다. 2022년에 출간된 [안보에서 평화로] 2024년 [인권과 통일] 출판사는 열린서원(이명권 대표). 두 권 모두 원광대 이재봉 명예교수님이 산파 역할을 하셨다. [갈무리 사진 - AOK]
사랑방에서 들을 수 있었던 말씀들은 하나같이 간결하면서도 깊은 지혜를 품고 있었다. “안보는 하나는 살고 하나는 죽는 것이다. 그러나 평화는 서로 다 살게 하는 것이다.” “평화는 이질과 이질이 만나 동질로 나아가는 과정이다.” “피스메이커는 적과의 대화를 만드는 사람이다. 원수를 수용하는 것이다.” “통일은 만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과정이다. 그 과정은 쉽게 끝나지 않는다. 끝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옳다” 그리고 남쪽의 자본주의와 북쪽의 사회주의가 정반합의 논리를 통해 더 높은 차원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그의 변증법적 통일론은, 사랑방에 모인 우리 모두의 사고의 지평을 넓혀 주었다.
통일 이후를 준비하는 상상력, 통일평화대학
박한식 교수님은 우리가 어떤 통일된 조국을 원하는지조차 명확히 알지 못한 채 통일을 말해 왔다고 지적하셨다. 통일국가는 반드시 자신만의 이념을 가져야 하며,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중 하나를 선택하는 문제가 아니라 두 체제가 지닌 장점을 살려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한다고 강조하셨다.
이를 위해 그는 ‘통일 이념’과 이를 구체화한 ‘통일 설계도’가 필요하며, 그 설계도를 집단적으로 만들어 갈 공간으로 통일평화대학을 제안하셨다. 남과 북이 합의하여 개성에 통일평화대학을 세우고, 그곳에서 통일국가의 청사진을 준비하자는 구상이었다.
선생의 시야에서 통일은 한반도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식민지와 분단, 전쟁을 겪은 우리 민족은 인류 문명사적 차원에서 평화와 공존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할 책임이 있으며, 그 깊은 고난의 체험이 있기에 그 일을 해낼 수 있는 주체라고 믿으셨다.

개성의 고려 성균관 <이상 사진 AOK>
개성을 강조한 데에는 역사적 의미도 담겨 있었다. 개성은 고려 성종 11년(992년)에 설립된 국자감(國子監), 곧 세계 최초의 대학 중 하나로 평가받는 공간의 뿌리를 지닌 곳이다. 국자감은 이후 고려 성균관으로 이어졌고, 선생은 개성의 고려 성균관과 서울의 성균관을 잇는 ‘인간 띠 잇기’를 통해 남과 북,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자고 제안하시기도 했다.
남북 정부가 통일평화대학을 위해 합의는커녕, 서로를 ‘주적’, ‘적대적 두 국가’로 규정하며 관계가 최악으로 치닫는 현실 앞에서, 선생의 마음은 얼마나 무거우셨을까. 작년 10월, 마지막으로 열린 박한식 사랑방에서 그는 북미관계와 남북관계 모두 당분간 어려울 것이라고 내다보셨다. 그 예견 속에서 희망을 붙드는 일이 점점 더 버거워지셨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지금도 마음 한켠이 아프다.
길 위에서 다시 만날 스승에게
이제 우리는 큰 스승을 떠나보냈다. 그러나 동시에 통일이라는, 우리 시대 가장 무겁고도 피할 수 없는 화두(話頭)를 어떻게 이어갈 것인가라는 과제를 함께 떠안게 되었다. 선생의 이상을 한 시대를 대표한 지식인의 꿈으로만 남겨 둘 수는 없다.
통일평화대학은 학교 하나를 세우자는 제안이 아니었다. 그것은 분단 이후를 준비하는 집단적 상상력의 청사진이었다. 박한식 교수님이 남긴 통일평화의 길은 우리가 다시 해석하고, 다음 세대의 언어로 확장해 가야 할 미래 비전이다.
한때 나는 통일평화대학의 구상에 깊이 매료되었었다. 그 구상을 떠올릴 때마다 2018년 11월, 마지막으로 북녘을 방문했을 때 개성 성균관의 뜰에서 마주한 수백 년 된 은행나무들이 떠오른다. 잎은 모두 떨어졌지만, 그 웅장하고 기품있는 나무들에서 고려와 조선을 지나 식민지와 분단의 시련까지 견뎌낸 우리 겨레의 옹골찬 기개가 느껴졌다.
나는 지금도 꿈을 꾼다. 꿈속에서 개성 성균관의 뜰을 거닐다가 선생님을 다시 만날 것이다. 그리고 그 온유하고 지긋한 목소리로 들려주시던 분단 극복의 지혜와 통일평화대학의 이상이 결코 이상에 머물지 않도록, 앞으로도 선생님과의 대화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정연진 AOK 상임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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