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새벽 일찍 일어나 어제 표순제 형이 사온 밥을 먹고 출발한다. 밥 한 그릇이 다 들어가니 든든함이 느껴진다. 어제는 한인들이 많이 사는 뉴저지에서 여장을 풀고 오늘 유엔빌딩에 들어와서 이제 긴 여정의 종지부(終止符)를 찍었다.
이 길은 예상치 못하게 덤벼드는 어려움과 어떻게 마주서야 하는 지 혹독한 훈련을 하고 돌아가는 마지막 길이다. 내 스스로를 돌아보며 지난 과거 속에 잊어버리고 싶었던, 도망치고 싶었던 삶의 질곡(桎梏)과도 떳떳하게 마주보며 화해를 하고 돌아오는 길이다. 이제 이 길의 끝에 서면 자신감을 잃고 주눅 들어서 움츠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곳이 나의 새로운 출발지점인 것은 큰 의미가 있다.

125일 동안 나는 삶의 질량을 벗어던지고 마치 우주유영(宇宙游泳)을 즐기는 우주인처럼 자유를 누렸다. 내 자신에게 최선을 다할 때 찾아오는 희열을 충분히 만끽했다. 마음에 희열이 오면 몸이 유연해지고 사고가 유연해진다. 사고의 경직성이 사라지면 사랑이 찾아온다. 자신에 대한 무한한 사랑과 주위로 퍼져나가는 사랑을 느낀다.
오버펙으로 들어오는 길은 여러 친구들이 어깨를 나란히 함께 뛰어주어서 발걸음의 무게를 덜어주었다. 공원 안의 야외무대에서는 한인사회의 인사들과 교민들이 나와서 환영행사를 성대히 치루어주셨다. 우리는 '우리의 소원은 통일'과 '아리랑'을 합창했다. 우리의 합창은 아직은 작지만 은은하게 뉴욕 하늘 아래 은은하게 퍼져나갔다. 내 눈가에도 눈물이 촉촉하게 흘러내린다. 내가 길거리에 떨어뜨린 땀도 일어나 노래와 함께 퍼져나가는 것 같았다.
이제 마지막 날, 오버펙 공원에서 뉴욕의 유엔빌딩으로 향하는 길에는 뉴욕의 달림이 친구들이 평일인데도 생업도 잠시 접고 나의 마지막 발걸음을 가볍게 해주려 같이 뛰어 주었다.
조지워싱턴 다리를 지나며 내려다 보이는 허드슨 강물은 변함없이 흐른다. 지나온 길을 잠시 거슬러 되돌아보니 뉴욕이 가까워질수록 다시 깊은 오지(奧地)처럼 느껴진다. 다시 그 길을 달릴 수 있을까? 아니다 아무 것도 모르고는 뛰어들 용기가 있어도 알고는 다시 할 것 같지 않다. 그 모진 일들을 다 견뎌내고 이 다리를 건너는 나는 흙이 1,300도의 불가마 속에서 구워지면서 찬란해지 듯이 대륙을 가로지르며 끝없이 달리는 그 뜨거운 열기 속에 내 몸도 마음도 빛으로 가득찼다.

나와 친구들은 커다란 태극기를 휘날리며 허드슨 강변도로를 달려내려오다 다시 센츄럴팍으로 들어가서 주말이면 늘 달리던 그 길을 따라 달려내려오다가 브로드웨이길을 따라 내려와 타임스퀘어에서 멈춰 기념사진을 찍었다. 언제나 맨하탄에 들어서면 나의 동공(瞳孔)은 여행자의 그것으로 바뀐다. 쉴새 없이 지나가는 볼거리를 담아내기 위하여 마음이 얼마나 분주해지는 지 모른다. 뉴욕은 여행자들의 혼이라도 빼앗아갈 볼거리와 먹거리 패션이라는 이름의 입을 거리를 제공한다. 이제 방향을 바꿔 유엔본부로 향한다.


세상은 빠른 속도로 변해간다. 출산율은 떨어지고 평균수명은 늘어간다. 축복으로 다가와야할 장수사회가 생산인구는 줄어들고 노인 의료비는 증가해서 자칫 재앙(災殃)이 될 수도 있다. 57 세의 나는 이모작 인생을 꾸려가기에 충분한 힘을 스스로 증명해냈고, 거기에 알맞은 경험도 있다. 꿈을 품기에 넉넉한 시간도 있다. 뽀송뽀송한 피부의 탄력과 양 볼의 붉은 빛은 사라졌지만, 이마엔 잔주름이 하나 둘 생겨나고 머리에 힌머리도 늘어나지만, 새롭게 도전하는 용기, 일상의 평범함을 거부하는 자유로운 상상력은 바람 부는 날 파도처럼 거세게 밀려온다.
유엔본부 앞 함마슐트 광장으로 달려드는 나의 발길은 먼길을 달려와서 모래톱으로 잦아드는 파도처럼 잦아들 것이다. 그러나 달리면서 내 안에 생긴 연어알 같은 새희망의 씨는 다시 수 많은 다른 희망으로 부화(孵化)되어 더 먼 바다로 퍼져나갈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