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를 맞으며 엘비스 프레슬리의 ‘Love me tender’를 흥얼거리며 4 마일이나 되는 위대한 강 미시시피를 건너 멤피스에 도착했다. 두 주 동안 나를 괴롭히던 다리 부상은 이제 씻은 듯이 나았다. 거의 모든 미국의 강들이 모여 흐르는 강은 요즘 거의 매일 내리는 물로 선착장이 물에 잠겨 있었다. 일요일 아침 다운타운의 거리는 적막(寂寞)에 감싸여 있었다. 블르스의 도시 멤피스의 일요일 아침에는 블르스 대신 교회의 종소리가 은은하게 퍼져나가고 있는데 보이는 것은 빌딩 한구석에 자리를 펴고 자고 있는 홈리스들 뿐이었다.
이렇게 수런거리며 흐르는 물과 그 강변의 무성한 숲, 그 숲 속에서 뛰고 날아다니는 많은 생명들, 물에 잠기는 것이 예사인 주위의 들판들은 예술적 영감(靈感)을 불러일으키기에 제격이겠다. 문화적으로 열등감이 있는 미국인들이 셰익스피어만큼 자랑스러워하는 마크 트웨인이나 엘비스 프레슬리 등이 최고의 예술의 경지에 오른 것으로도 그것은 충분히 증명이 되었다.
모험을 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 것이 인간의 내면의 속성이라면 소설 속의 어린 소년 톰 소여와 현실의 나이 좀 먹은 내가 시공을 초월해서 만나는 것은 미시시피강의 물결처럼 두근거리는 만남이다. 시대가 필요로 하는 소년, 학교가 가르치고자 하는 것과는 정반대의 학생이 사람들에게 오랜 세월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기이한 역설이다.
근면 성실하게 일하면서 눈치나 보면서 적당히 시류에 적응하면서 흔한 경력 쌓기와는 사뭇 다른 삶을 살다가 어느날 느닷없이 이렇게 미대륙횡단의 대장정에 오른 것은 내 안에 오랫동안 숨죽이고 살고 있던 톰 소여에게 비로서 바깥구경을 시켜주는 일이다. 오늘 멤피스에서는 소설 속의 톰 소여와 내 안의 톰 소여의 격한 만남이 있었다.
내가 지금껏 지나왔던 많은 강들과 앞으로 지나갈 많은 강들이 다 미시시피 강으로 모여서 흐른다. 미시시피는 충분히 아이나 어른이나 호기심과 모험심을 가득채우고도 남을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 위대한 강은 무지개 빛 상상의 날개를 펴게 하지만 두려움의 대상이기도 하다. 끝없는 호기심과 의문을 던지는 사람만이 살아있는 생생한 답을 얻을 수 있다. 오십 대 후반에라도 삶을 윤택하게 채울 수 있는 답을 얻어서 한 오십 년 더 윤택하게 산다면 그거야말로 대박나는 장사이겠다.
인간이 생각하는 동물이라면 인간은 또한 모험하는 동물이기도 하다. 모험에는 많은 위험이 따른다. 독수리가 절벽에서 날개를 펴고 몸을 던지는 순간 날아오르는 것과 같이 두려움의 구름을 걷어내고 상상의 나래를 펴고 두려움 속으로 몸을 던지는 것이 모험이다. 끝없는 경쟁에서 살아남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톰과 헉처럼 재미있는 일을 하면서 창조적인 생각을 하는 아이들이 사회에 기여하는 교육시스템이 마련되면 좋겠다.

어제 Marion이라는 도시를 지나는데 몇 사람이 벽화를 그리길래 무엇을 그리는 지 물어보았더니 1865년에 4월 27일 1700여 명이나 죽은 미시시피강의 해상사고가 있었는데 미국인들의 가슴에서 잊혀진 일이 되어 안타까워서 벽화(壁畵)로 재현한다는 것이다. 나는 잊혀진 해상사고, 잊혀지기를 원하는 세월호 사고를 떠올렸다. 376명이 정원인 증기기관선에 2,300여 명을 태우고 Sultana 호는 가라앉았다. 1912년 4월 15일 가라앉은 타이타닉호보다도 더 많은 희생자를 냈는데 그해 4월 남북전쟁이 끝나고 링컨 대통령이 암살당하고 또 연이어 그 암살자가 죽는 뉴스에 묻혀서 이 사건은 거의 보도도 안 되고 역사 속에서 묻혀버리고 말았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4월 18일 팽목항에서 사고가 난 직후 보도에서 전원 구출할 수 있다는 아나운서의 멘트를 잊을 수가 없다. 그러고 보니 4월은 잔인한 달이 맞는가 보다.